Page 5 - 한비21 (제5호) 2024년 11월 25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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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      였다. 조선 조정은 1797년 인

        삼 무역을 공식 승인함으로써

       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자 했고,

        1899년(고종  36년)에  인삼과
        홍삼 제조의 관리를 위해 '궁내

        부 삼정과'를 설치했다.

          인삼무역으로 유명한 거상 임

        상옥(1779-1855)도 의주 출신

        이다. 의주 사람들은 청나라 뿐

        아니라 동남아 각지로 인삼행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◀ 일제 강점기였던 1935년 필리핀에 처음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와 이국땅에서 조국의 해방, 2차 세계대전,
        상을 떠났다. 인삼행상들은 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한국전, 조국의 근현대사를 직간접적으로 경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험했던 박윤화 회장. 의주 출생인 그는 초대
        로 상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필리핀 한인회장(재임1967~1979)을 지냈으
        고, 상회는 이익금 일부를 떼어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며, 1945년 대한인국민회 필리핀지방회 정식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조직 보고를 한다. 한필 양국정부가 공식수교
        임시정부와 독립자금에 지원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를 맺은것은 1949년, 마닐라에 공사관이 설치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된 것은 1954년이다. 그는 평생 한필 양국 민
        였으며, 거사 이후 도피에 나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간외교·인적교류·스포츠외교 지원에 앞장 서

        독립운동사들에게 도피자금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왔다. 또한 공식자료로 확인된 가장 오래된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한필 가족이기도 하다.
        도피처를 제공하기도 했다.

          1927년 조선일보 기사를 보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대동아공영권  야욕을  꿈꾸며

        면,  30여명의  인삼행상이  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하나씩 계획을 준비 중에 있었

        리핀으로  떠났고,  1931년  조 도움을 주었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던 것으로 보인다.
        선일보 기사에서는 중국과 동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당시  필리핀의  인구 는  약  조선일보 1923년 11월 8일자

        남아 각지를 누빈 인삼행상만  1300만  명으로,  조선인구  약  '도미유학생이  증가하고  있다'

        500~600여명에 달한다고 전하 2500만 명보다 적었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라는 기사를 보면, 당시 두 가

        고 있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33년  척무성(일본의  식민 지 이민 방법이 사용되었던 것

          이 시기 아예 외국에 정착한  지 관리 행정기관)은 대이주정 으로 보인다.

        인상행상(혹은 상회 판매거점) 책을 세우고, 만주·남미·동남아  첫째, 중국에서 미국인 선교

        들도 있었다. 필리핀 차이나타 각국에 한인 집단 이주계획을  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하
        운에 터를 잡고 중국인들에 인 세웠다. 이 계획에 필리핀 이민  며, 중국 국적으로 귀화 후 여

        삼을 팔던 고려약방 주인 최무 2500명도 포함되어 있다.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행권을 얻어 미국행을 하는 방

        집은 1935년 필리핀 땅을 처음  식민지 독립을 인정하려는 미 법이 있었다. 그러나 중국인 신

        밟은 박윤화 선생(초대 필리핀  국과 달리 일본은 식민지 확장 분이기에  불편함이  있었다고

        한인회장, 의주 출신)의 정착에  을 원했다. 일본은 이 시기부터  한다.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둘째,  당시  미국령이었던  필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리핀에는 특별법이 있어 6개월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간 체류하고 필리핀 정부에 등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록하면 시민권 신청이 가능했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다. 자치령이긴 하지만 미국 국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민 신분이 되기에 외국에 망명



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 페이지에 계속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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